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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카와 다쿠미 평전: 조선의 흙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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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도서명 아사카와 다쿠미 평전: 조선의 흙이 되다
정가 17,000원
저자 다카사기 소지
수량 수량증가수량감소
역자 김순희
발행일 2005년 11월 30일
형태사항 285쪽
ISBN 978895872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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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상세정보

 

세계를 한 가지 색으로 칠해 평화를 얻고자 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자연이 다르고 역사가 다르기 때문이다. 동양을 서양처럼 만들어버린다고 평화가 오는 것은 아니다. (……)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서로 자신의 입장에서 존재 이유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야나기 무네요시


저무는 한일 우정의 해
2005년은 한일 우정의 해다. 그러나 올해가 과연 ‘우정의 해’인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이어 정상회담마저 무산된 반목·갈등의 한 해로 저물 판이다. 외교에는 힘의 대결만 자리하기 때문이다.
기울어가는 한일 우정의 해, 그늘진 과거사에서 소금처럼 빛나는 두 일본인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다이아몬드 없이는 살 수 있어도, 소금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다. 소금 같은 인간다움으로서 그리고 아시아인으로서 한국(조선)을 만난 일본인―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1891~1931)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는 조선을 사랑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광기의 세계화 시대에 문화의 가치와 아시아인이 가져야 할 문제의식이라는 근본적 물음에 대답하기에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
1914년 조선에 와서 18년간 임업시험장에서 일하며 야나기 무네요시와 함께 조선민족미술관을 세워 조선의 민예를 연구한 아사카와 다쿠미. 조선총독부의 월급을 받는 공무원이었지만 여타 일본 식민지배자와는 달랐다. 우리말이 유창했고 조선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다. 조선 사람과 똑같이 한복 바지저고리를 입고 수염을 기르고 긴 담뱃대를 사용했다. 1931년 그가 급성폐렴으로 사망하자 이웃의 조선 사람들이 통곡하며 서로 상여를 메겠다고 나섰다. 유언에 따라 그의 장례는 조선식으로 치러졌고, 그는 조선의 흙이 되어 지금도 망우리에 묻혀 있다.
저자 다카사키 소지는 『아사카와 다쿠미 평전』을 그의 삶이 주는 울림에 사로잡힌 사람들과 함께 쓴 책이라고 했다. 겸손의 표현이지만, 책 곳곳에 아사카와에 매료된 많은 이의 애정이 완곡하게 스며 있다. 그의 생애를 통해 한국과 일본, 더 나아가 타자와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는 법을 배운다. 그의 삶이 당시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상대를 자기의 가치관으로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1923년 일본 간토關東 대지진 때 벌어진 조선인 학살에 대해 아사카와는 소문만 믿고 조선인을 죽인 일본인에게 문제가 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에게 조선인과 일본인은 똑같은 무게를 지녔다. 그는 조선이 독자적으로 발전해 왔음을 인정했고, 조선을 멸시하거나 동화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아사카와는 “일본의 지배는 ‘조선’ 그 자체의 ‘파괴’와 연결된다”고 믿었다. 나와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연스러움을 해치지 않는 것. 이것이 그의 일생을 되돌아보는 의미다. 아사카와 다쿠미가 이를 자신의 삶에 녹여냈기 때문이다.
임업 기수, 즉 산림학자였던 아사카와는 당시 일본의 무분별한 개발, 수탈적 임업 때문에 헐벗고 균형 잃은 조선의 산을 안타까워했고, 학교에서 배운 죽은 지식만으로 잘난 척하며 자연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동료를 비판했다. 자연이 일러준 방법만이 산과 숲을 키우는 길이라는 신념은 그의 삶의 태도와 통한다.
민예연구가로서는 조선의 민예품은 고유해서 중국, 일본과 구별된다고 평가했다. 그가 수집한 조선민족미술관 전시품은 잘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라 실제로 조선인들이 쓰던 생활의 때가 묻은 물건들로 그는 일상에서 친숙하게 쓰이는 물건, 그리고 사용자의 손에서 차츰 특유의 아름다움을 발휘하며 완성되어 가는 조선의 공예품이 올바른 공예의 표본이라 보았다. 또한 조선 도자기의 이름을 조사해 만들 때부터 불리던 이름으로 그릇들을 부르려고 했다. 조선인들과 조선의 언어로 이야기했듯 그릇도 제 이름을 찾아준 것이다. 올바른 이름과 용도를 알고 친숙해지면 그것을 만든 사람들, 그 민족의 생활과 역사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다고 여긴 아사카와 다쿠미의 조선 사랑은 이상주의자의 유희가 아니었다. 그의 눈길은 조선의 민중, 조선의 현실에 닿아 있었으며, 그의 조선 민예 연구는 예술의 힘으로 조선과 일본의 잘못된 상황을 극복하려는 노력이었다.


미학적 아나키스트
근대 서양의 가치관이 압도적인 영향력을 미치던 20세기 초반, 일본 역시 제국주의 국가로서 약육강식 지향의 노선을 걷고 있었다. 청일전쟁과 연이은 러일전쟁의 승리로 일본 민중이 애국주의에 빠져갈 무렵, 일본의 지식인층은 개인의식의 확립,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의 수용 그리고 동·서양에 대한 재정의再定義 등 어떻게 근대를 그리고 서양을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을 품고 있었다. 이들이 품게 된 서양 콤플렉스는 여러 민족의 문화를 서양 문명의 모방 정도에 따라 서열을 매기는 서양 중심주의로 드러나거나 혹은 서양 문명에 대한 반발인 국수주의로 나타나 대동아공영권 구상이나 ‘일본맹주론’ 같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야나기 무네요시 평전』의 저자인 국제관계 전문가 나카미 마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야나기의 차별성을 지적한다. 야나기는 두 가지 오류를 모두 벗어나 서양 제국주의를 모방한 ‘일본 제국’을 해체하고 일본 안팎의 여러 민족이 문화적으로 대등하게 공생하는 아시아를 이상으로 삼은 실천가이자 사상가라고 말한다.
다른 문화를 추종하거나 비하하지 않고 자문화의 개성을 명확히 하려는 야나기의 염원은 그의 관심을 동양적인 종교·예술로 이끌어갔다. 그 결과 창출된 것이 바로 민예운동이었다. 민예운동은 민중이 만든 일상잡기에 착안해 중국이나 조선의 미와는 다른 일본 독자의 미를 찾으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한편 민예운동은 미의 관점에서 이상사회를 추구하려는 예술적인 사회변혁 운동이었다. 야나기는 민중적인 일상의 미를 이상향으로 삼고, 뛰어난 미의 창출을 방해하는 자본주의 사회 비판으로 나아갔다.
또 그는 자연환경과 역사의 차이에 따라 각 민족문화를 토착·유기적으로 하나의 것, 하나의 생명처럼 여기고 서로 ‘생명’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광화문 철거 반대를 외치고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하고 조선총독부의 석굴암 보수를 비판하는 등 조선의 문화는 조선인의 손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모두 이런 생각의 반영이다. 또 이는 절친한 벗이자 평생 경애했던 아사카와 다쿠미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야나기는 민예운동을 창시, 확립하고 일본민예관을 세워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일본’ 문화를 명확히 했다. 나아가 ‘민족’을 단위로 한 ‘복합의 미’라는 평화 사상과 연결해 상대화함으로써 일본 문화를 열린 형태로 확립시키는 데 거의 성공했다. ‘복합의 미’ 사상은 평화는 세계를 한 가지 색으로 만드는 데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평화는 서로 이질성을 승인하면서 배우고 약점을 보완하여 더욱 풍요롭게 하는 데서 나온다는 이 사상은 모든 무력행사를 부정하는 절대평화의 신념을 기반으로 한다.
세계화의 바람이 휘몰아치는 현재, 약자의 입지는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 문화의 가치를 서구화가 아닌 자문화의 개성 확립에서 찾고, 세계가 정치·경제적 강자의 논리로만 수렴되지 않도록 저항한 야나기의 평화 사상은 우리에게 어떤 깨달음과 화두를 던져주는가. 단순한 문화상대주의를 넘어 윤리에 근거한 세계 평화를 실현할 실천 전략을 고민했던 한 지식인의 초상이 여기 있다.

3판을 내면서
개정증보판을 내면서
시작하며 조선인을 사랑하고, 조선인에게 사랑받은 사람

1장 다쿠미를 낳은 땅
시인의 자손
좋은 할아버지
어머니 치노 게이

2장 조선 도자기의 달인, 형 노리타카
조선에 간 아사카와 노리타카
조선 도자기를 연구하다
도예가, 조각가 그리고 시인
조선으로, 조선의 민중 속으로

3장 조선의 산을 푸르게
자연과 함께 자란 어린 시절
숲을 빼앗긴 조선에 가다
산과 숲은 자연에 맡겨야 한다

4장 민예에 심취하다
야나기 무네요시와의 인연
조선에 조선의 미술관을 세우다
새로운 발판

5장 조선 미美의 발견
조선 밥상에 빠지다―『조선의 소반』
제 이름을 부르다―『조선도자명고』
조선의 아름다움을 담아―『소품집』
피우지 못한 꽃
6장 다쿠미의 일기
일기, 발견되다
산의 생명력만이 숲을 키운다
나눌수록 커지는 조선 도자기 사랑
더 이상 죽이지 마라
따뜻한 눈길

7장 다쿠미와 친구들
낮은 데로 임하는 우정
지음지기
조선공예회를 만들다

8장 조선의 흙이 되다
갑작스런 죽음
조선 땅에 묻히다
그리움―『고게이』 아사카와 다쿠미 추도호
아사카와 다쿠미를 애도한다

9장 기억 속에 영원히
그리울수록 더욱 커지는 사랑
영혼의 울림
되살아나는 그의 자취
가깝고도 먼 이웃의 다리가 되어
제2의 아사카와 다쿠미를 꿈꾸다
한일 교류의 공간, 아사카와 형제 자료관

마치며 식민의 그늘, 인간의 빛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인생의 반환점에서 느낀 진실한 사랑

아사카와 다쿠미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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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사키 소지

1944년 일본 이바라기현 출생. 도쿄 교육대학 대학원에서 일본 근대사, 한국 근대사를 전공했다. 잡지 『시소노카가쿠』에서 일했다. 현재 쓰다주쿠 대학 국제관계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황석영의 『객지』『무기의 그늘』등을 번역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데 힘썼다. 우리나라에는 전후 일본 최고의 역사가이자 북한 전문가인 와다 하루키와 함께 지은 『북한을 읽는다』가 소개 되었다.

김순희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간세이가쿠인 대학 문학부를 졸업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석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도요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겸임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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