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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용훈의 그림읽기] 관능과 유혹, 혹은 비아냥
작성자 효형출판 (ip:)
  • 평점 0점  
  • 작성일 2012-03-28 19: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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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608

막스 페흐슈타인 <초록 쇼파>

마네 <올랭피아>

마네 <올랭피아> 중 침대 끝의 고양이

 

수음하는 소녀와 관능적 고양이의 성적(性的) 도발

관능의 초록. 초록색은 거대한 파도처럼 화면을 압도한다. 화면 전체를 포장할 듯 위세가 대단하다. 그러나 초록은 상흔처럼 던져진 검은 붓질의 어두움에 발목이 잡히면서 분위기를 칙칙하고 위악적으로 몰고 간다. 천박하기까지 한.

막스 페흐슈타인의 ‘초록쇼파’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비스듬히 턱을 괸 소녀의 나른함은 관능적인 연분홍 빛에 흥건하게 젖어 검은 초록과 대비된다. 선홍빛 열락은 몸의 이곳저곳을 순회하듯이 천천히 기분좋게 퍼져 나간다. 소녀는 천천히 몸을 꼬고 뒤틀며 허벅지 사이로 손을 가져가고. 감각적 촉수로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애무하며 이윽고 깊숙한 사타구니로 슬그머니 진입한다.

손은 스스로도 흥분해 있다. 성적인 흥분으로 붉게 달아오른 소녀의 얼굴보다 손은 더 붉게 칠해져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손은 스스로도 자위하는 듯 하다. 왼손은 성감대를 자극하며 육신을 보다 짜릿한 쾌락으로 이끈다. 타는 듯한 노란색 줄무늬가 상징하는 것처럼 소녀의 몸은 전신으로 비등한다. 절정으로 치닫는 소녀의 성적 흥분과 그 강도가 가히 어느 정도인지 예상할 수 있을 듯 하다. 그녀는 온통 붉다.

소녀의 곁, 그러니까 반대 편에 순백으로 빛나는 고양이가 달콤한 잠에 빠져 있다. 소녀의 붉은 실내화는 고양이의 흰빛과 충돌할 듯 첨예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그래서일까. 고양이의 흰빛은 점차 붉은 빛을 물처럼 머금기 시작한다. 고양이는 소녀의 수음에도 아랑곳 않고 나른한 오수를 즐기고 있으니 참으로 태연자약하다. 그 모든 것이 귀찮다는 듯 잠에 빠져 있다. 그것은 소녀도 마찬가지 아닐까. 어찌 보면 각자는 묘한 삼매경에 몰입하고 있는 듯 보인다.

본래 고양이는 표독스럽고 날카로운 검은 눈동자 탓에 불길함을 상징하여 경원시되기도 한다. 특히 검은 고양이는 양면적이다. 에드가 앨런 포우의 ‘검은 고양이’는 악마적이고 흉물스런 힘을 명시적으로 드러내면서도 정의라는 상징을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마네의 ‘올랭피아’는 매춘부의 자세도 문제였지만, 특히 그녀의 발 옆에 숨을 듯 웅크린 검은 고양이의 성적인 천박함이 더욱 공격의 대상이었을 정도다.

이처럼 고양이는 알 수 없는 어떤 불길함, 무의식 속의 탐욕과 위선과 잔인함을 내포하다가도 우아한 자태와 섬세한 발놀림, 그리고 우리의 폐부에까지 도달하는 매혹적인 눈길로 우릴 유혹하는 묘한 설렘이기도 하다. 팜므 파탈이 연상된다. 그래서일까, 종종 고양이의 부드럽고 윤기있는 털을 애무하는 것을 여성의 성기를 애무하는 것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혹은 그러한 성적 취향을 자극하고 권장하는 관능적인 유혹으로 이해한다.

고양이의 관능성을 도발적인 여성의 관능과 직접 연계한 보들레르의 다음의 시를 보아도 쉽게 이해갈 듯 하다.

내 손가락들이 천천히 네
목과 탄력 있는 등을 애무할 때,
그리고 내 손이 기쁨에 취해
전율하는 네 몸을 더듬을 때
나는 마음 속에서 내 여인을 보게 되는 것이다.
- 보들레르의〈고양이〉에서

보들레르는 고양이를 여성으로 은유한다. 급기야 여성의 성기로까지 확대해석한다. 여성의 성기나 고양이는 모두 표면이 부드럽고 윤기있는 모발로 덮여 있고 그것이 사랑스러운 애무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일치하는 것이다. 두 대상을 애무하는 손의 섬세한 동작이 둘 사이의 유사성을 충분히 예상케 한다. 기쁨에 취한 손이 ‘전율하는 네 몸’을 촉촉하게 더듬는 손의 감촉에서 ‘내 여인을 보게’된다는 자극적인 고백은 숨을 막히게 한다.

이처럼 고양이는 에로틱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유혹이다. 다소 퇴폐적이기까지 한 고양이의 관능성은 따라서 성적 충동이나 쾌락과 자연스레 만난다. 수음하는 소녀 곁에 달콤한 오수에 빠진 듯한 고양이는 그러므로 작품의 분위기를 관능적 몽환으로 몰고 간다. 이제 격정적으로 타올랐던 욕망은 이제 꿈처럼, 꿈처럼 침잠하는 듯 하다. 마치 벽난로 근처에서 안식처를 마련하고 특유의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걷고 누우며 평온함을 즐기는 고양이 그대로다. 고양이는 지금 성적 흥분에 온통 젖어있는 소녀의 육체적 나른함까지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화가 막스 페흐슈타인은 수음하는 소녀와 관능적인 고양이를 통해서 성적 도발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그는 보수적인 성모랄로부터 탈피하여, 성 그 자체가 갖는 심리적 충동과 열락에 보다 주목한다. 다리파가 의도적으로 낡고 관습적인 것을 부정하고 무시하였으며, 20세기의 새로운 감성과 본능에 감각적으로 반응한 것을 상기한다면 이해가 빠르리라. 마찬가지로 페흐슈타인 역시 그런 취지에 동참하고 이를 지지하였기 때문에, 이 그림 역시 기존의 성모랄에 대한 은근한 비아냥은 아닐까 유추케 한다.

수음으로 성적 탐닉하는 소녀의 흥분과 그 쾌락의 감미로운 맛을 즐기도록 권유하면서 보수적인 성담론의 허위와 가식을 조롱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다 적극적으로는 그것의 억압적 인 힘을 해체하려고 의도한 것은 아닐까 한다. 페흐슈타인의 과장된 색채와 감정, 충동적이고 도발적인 붓놀림은 달콤한 쾌락의 격정을 노래하는 불길한 주술 같다. 퇴폐적 몽환에 가까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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