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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용훈의 그림읽기] 지독한 사랑이 여기 있다
작성자 효형출판 (ip:)
  • 평점 0점  
  • 작성일 2012-03-28 19:2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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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419

샤갈 <생일>

샤갈 <화촉>

 

아내에게 받은 꽃 선물에 감동… 샤갈식 사랑 표현

그가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가슴을 찢고 짓이기며 잔인하게 그를 떠났다. 그는 떠나는 그녀를 잡지 못했다. 극적으로 방문한 이별 앞에 그는 속수무책이었다. 일말의 연민 역시 그를 걷어차고 달아났다. 슬픔은 그의 발목을 붙잡고 절대 놓지 않았다. 그리움을 간직한 채 두 사람은 더 이상 만나지 못했다. 절대 만날 수 없었다. 형형한 눈길로 그녀는 이슬처럼 사라졌다. 그럴 수밖에, 불행하게도 그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샤갈은 30년 동안 동고동락을 같이 한 아내 벨라 로젠펠트의 주검 앞에서 실신했다. 그는 9개월 동안 붓을 들지 못했고 정신적 공황에 시달렸다. 심한 허탈과 무력감에서 허우적거렸다. 벨라. 대규모 상점을 운영한 상류계급 출신. 출중한 미모의 소유자. 모스크바 대학 재학 중에 이미 뛰어난 교양과 통찰력을 갖춘 인텔리. 특히 유럽의 고전주의적 전통의 세례를 몸으로 체득하고 이를 섬광처럼, 폭포수처럼 쏟아내며 샤갈의 예술적 영감을 끊임없이 자극했던 영혼. 샤갈의 그림에서 보들레르의 시를 연상한 번뜩이는 예지의 소유자였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샤갈은 그녀의 눈을 제대로 응시하지 못하고 요동치는 심장과 싸워야 했다. 다른 세계에서 불현듯 방문한 이 아름다운 여성 앞에서 그는 내내 두려움과 경외감을 동시에 맛보며 너무 좋아서 벌벌 떨기까지 했다. 그는 그녀의 커다랗고 맑고 동그란 눈을, 나의 눈이고 영혼이라고 단정했다.

제1차 세계대전,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은 샤갈의 조국 러시아에 선전포고했다. 굶주림과 허기로 세상은 혼미를 거듭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난과 추위, 그리고 굶주림으로 죽어갔다. 전쟁의 공포는 인간을 절망의 나락으로 내팽개쳤다. 더구나 샤갈은 유대인이었으니, 늘 감시와 의심의 대상으로 지목당했다. 유대인은 러시아로부터 추방당했으니, 그의 고통이 오죽했을까. 이처럼 암울한 시기에 그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벨라의 격려와 사랑이었다.

그의 작품 '생일'. 보라, 전쟁의 기아와 가난, 그리고 심리적 추방 상태에서 이런 아름다운 그림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은 기적 같지 않은가. 이 그림은 샤갈의 생일, 벨라가 마련한 꽃다발에 감동한 샤갈이 자신들의 사랑을 환상적으로 자축한 작품이다. 흰색 컬러의 검은 드레스, 그리고 검은 구두는 순결하고 깨끗한 영혼의 벨라를 더욱 경건하게 만든다. 붉은 바닥은 숨가쁜 자기탐닉에 빠진 열정적인 사랑을 화사하고 현란하게 치장한다. 그들의 사랑은 경건하고 열정적이다.

샤갈은 그녀를 이렇게 현묘한 색채의 물결로 인도했다. 혼미에 빠진 그녀를 정신차릴 틈도 주지 않고 곧바로 지상으로부터 하늘로 또 이끌었다. 연인들은 지상에서 천상으로 비상한다. 사랑은 이처럼 비약한다. 거주하는 방은 그들의 벅찬 사랑을 담기에 지나치게 협소하다. 그들은 이 작은 방을 떠나 자신들의 사랑을 자유롭게 펼치고자 한다.

벨라는 당시를, "몸을 일으킵니다. 팔다리를 뻗으니 바닥에서 천장까지 닿습니다. 당신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내 고개도 돌리려고 합니다. 우리 둘이는 함께 아름답게 장식된 방 위로 떠올라 날아갑니다. 우리는 창문을 가로질러 나가려고 합니다. 창 밖에서 구름과 푸른 하늘이 우리를 부릅니다"고 황홀하게 고백한 바 있다. 샤갈은 자신들의 사랑을 천상의 사랑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참혹한 전쟁도 이때만큼은 샤갈과 벨라를 빗겨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쟁이 종식되자 이번에는 러시아 내전이 발발했다. 극심한 혼란과 굶주림 속에서 사람들은 낙엽처럼 스러졌다. 샤갈 역시 혁명 예술에 동참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요주의 인물로 감시까지 당했다. 그에 대한 질시와 모멸감은 그를 더 이상 러시아에 머물지 못하게 했다.

그는 베를린으로 도피했다. 수많은 망명객과 도피자들 사이에서 그는 작품 제작에만 전념했다. 그리고 파리가 그를 불렀다. 그는 파리로 지체없이 진격했다. 동경의 도시 파리는 그의 기대에 부응했다. 그는 명성을 얻었다. 풍요로웠고 행복했다. 거기에 평온함까지 가세했다. 그의 색채는 원색으로 빛나고 색은 장엄하고 찬란한 교향악을 연주했다. 그는 만족했다. 미술관 순회를 통해 수많은 대가의 작품과 감동적으로 해후하는 행복까지 만끽했다. 독일이 파리를 점령하기 전까지는.

반유대인법 때문에 그는 도망치듯 파리를 떠나 뉴욕행 배에 몸을 실었다. 샤갈은 활화산처럼 폭발할 것만 같은 뉴욕의 역동성과 그 위용에 매료된다. 샤갈과 벨라는 비록 조국 러시아와 파리를 떠났지만 곧 안식처를 마련하고 안정된 생활을 영위했다. 1944년 8월 25일 파리의 해방 소식. 벨라는 곧 파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분했다. 그녀는 매일 행복했다. 이제 샤갈 부부는 명성과 부를 즐기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들이 비록 그런 생활을 원치 않아도 이제 지긋지긋한 전쟁의 공포, 계속되는 탈출과 망명 등으로부터 최소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오오 잔인한 운명이여. 벨라는 갑작스레 병이 났다. 아직 생명과는 무관했다. 그러나 먼 이국 땅에서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것이 화근이 될 줄은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다. 그것이 그녀의 생명을 칼처럼 내리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파리가 해방된 며칠 후 그러니까 9월 2일, 병원에서 그녀는 고난의 생을 마감했다. 운명은, 샤갈 그리고 딸 이다와 함께 행복에 취할 기회마저 제공하지 않았다.

샤갈은 현실을 절대 수용할 수 없었다. 그가 현실에 대항할 수 있는 일이란 9개월을 침묵하는 것이었다. 침묵. 침묵. 그러다가 섬광처럼 붓을 잡았다. 그녀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해야겠다는 다짐이 주문처럼 그를 깨웠다. 마침내 '화촉'이 탄생했다. 영원히 함께 하고 싶은 아내에 대한 지독한 사랑을 이렇게라도 드러내는 것만이 치유하는 길이리라. 죽어도 함께 하기를 바라는, 애틋한 그리움은 그리하여 이렇게 화려하게 화면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

과연 영원한 사랑은 있기나 한 것일까. 혹시 사랑은 없고 그리움만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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