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상품목록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현재 위치
  1. 게시판
  2. 효형이야기

효형이야기

효형이야기입니다.

게시판 상세
제목 [조용훈의 그림읽기] 서체, 그림, 선(禪)
작성자 효형출판 (ip:)
  • 평점 0점  
  • 작성일 2012-03-28 19:18:15
  • 추천 추천하기
  • 조회수 511

완당 김정희 <부이선란>

 

담백하고 고졸한 정신의 핵심 담아낸 <부이선란>

어둡고 혼탁한 칠통(漆桶)의 마음, 죽음마저 각오하고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정신의 소유자. 고담한 먹선 몇 개로 범속성을 소멸시키고 초초히 정신의 온전한 자유를 즐긴 형형한 정신. 바로 완당 김정희다. 일찍이 그는 환란과 모진 풍상을 번뜩이는 결의와 치열한 자기 탐구로, 자기 성찰로, 단아한 깨우침의 한 절정인 '세한도'로 승화시킨 바 있다. 경술(經術)과 문장(文章)이 해동의 제일이었다는 그였다.

그의 '부이선란(不二禪蘭)'이다. 극도로 절제된 필선은 담백하고 고졸한 정신의 핵심을 잘 담아낸다. 갈필은 날카로운 비수로 돌변하여 부박한 세계를 차갑게 냉소하고 경멸하는 것 같다. 세속을 초월하여 무애자재하게 뻗치고 굽이치며 비상하는 정신의 동세를 조형한다는 것이다.

'부이선란(不二禪蘭)'은 '부작란(不作蘭)'으로 지칭되기도 한다. 난을 그리되 그리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림의 제발(題跋)에 분명하게 "초서와 예기행의 법으로 그린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이것을 알아서 좋아할까?"라고 강조한 이유가 궁금해 진다. 그가 난을 그리고 그것을 그리지 않았다고 한 것은, 난을 회화적 의미로서가 아니라 서체적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완당은 글자의 조형미를 살리면서 서체처럼 난을 써내려 갔던 것이다. 담묵 갈필로 친 난잎은, 그가 난을 그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획처럼 흘리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완당은 그림도 서체의 한 방편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화의 일치. 화법과 서법의 차이를 두지 않았던 그의 진면목이 확연히 드러난다. 연구자들은 좌우대칭으로 꺾인 잎과 꽃대의 묘사에서 추사 특유의 개성주의적인 화법(折葉蘭畵法)이 엿보인다고 지적한다.

일전에 완당은 아들 상우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서 난치는 방법을 자세하고 꼼꼼하게, 학자적 완고함과 자부심으로 지적한 바 있다. "난치는 방법은 예서(隸書)를 쓰는 법과 가깝다. 반드시 문자향 서권기가 있은 연후에야 얻을 수 있다. 또한 난의 법을 꺼리니 만약 화법이 있다면 그 화법대로는 붓을 대지 않는 것이 좋다. 조희룡 같은 사람들이 내 난초 그림을 배워서 치지만 끝내 화법이라는 길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것은 가슴 속에 문자기가 없는 까닭이다. 지금 이렇게 많은 종이로 보내 왔지만 아직 너는 난치는 경지와 취미를 이해하자 못하는 구나." 하는 지엄한 지적이 바로 그것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그가 작품의 제목을 '부이선란(不二禪蘭)'으로 정한 것을 이해할 것 같다. 즉 선과 난은 둘이 아닌 것이다. 어떤 점에선 동일한 의미로 파악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다. 그는, "난초를 그리지 않고 있다가 20년에 우연히 그렸다. 마음 속의 자연을 문을 닫고 생각을 반추해보니 이것이 바로 유마의 불이선(不二禪)이다." 라고 회고했다. 그렇다. 그는 마음으로 체득하는 선의 경지에서 자신의 예술이 시작되고 있음을 고백한 것이다.

심의위주(心意爲主)의 문인화를 추구한 완당의 자부심은 대단한 것이다. 난초를 그릴 때도 많이 그리는, 즉 기법보다. "신기(神氣)가 모여들고 분위기가 무르익어야" 한다며 거듭 정신을 강조했다. 이때 그가 주장한 묘법은 난을 반드시 삼전(三轉)의 기법으로 쳐야 한다는 것이다. 글씨의 획을 긋는 필세를 난의 가지를 조형할 때도 적용시킨 것이다. 그의 난이 선적인 화의를 담고 있으면서도 서예적인 조형성이 발견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강한 묵색의 제발은 흐릿하고 옅은 난초의 가지와 대조되며 화면에 긴장감을 고조시키기도 한다. 진한 묵은 돌연 난꽃의 검은 두 꽃술과 연계되어 정신의 개화를 불꽃처럼 폭발시킨다. 꽃술에 반짝 빛나는 검은 묵색은 농담으로, 글씨와 그림과 정신을 매개하고 함축하는 빛나는 점경이다.

졸박청고(拙樸淸高)하면서도 선미 짙은 먹선으로 신기로 친 난의 하늘거림과 묵색. 그리고 진한 제발의 거친 필세는 또한 연인처럼 서로를 포옹하기도 한다. 짙은 먹선 몇 개와 생동감 넘치는 서체가 완당의 심오한 예술세계를 형상하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 이는 '세한도'처럼, 정신의 집중적인 수련과 단련 없이 탄생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세한도'와 '부이선란'은 같은 맥락이다.

요컨대 완당에게는 그림이란 사의(寫意)의 표현이다. 일반인들은 감히 도달할 수 없는 높은 정신세계를 적절하게 표현하는 수단이 그림이다. 한 개인이 갖는 교양의 정도와 학문적 성취는 글과 그림을 통해 표현된다. 물론 사상과 정서를 조형적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은 실로 어려운 작업이나, 그림은 세상에 대한 이치를 깨우치고 그것을 드러내는 한 방편인 것이다.

완당의 문인정신은 완당바람으로 지칭될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으며 많은 후학들이 그를 추종했다. 그들은 문자향과 서권기의 고매한 가치를 다투어 형상함으로써 문인화의 절묘한 맛을 체득하고자 절치부심 했다. 그러나 완당바람은 정조 이후 새롭게 등장하는 진경산수화풍의 개화를 저해했다고 비판받았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현실 인식과 창조적 새로움을 가로 막는 퇴행적 양식이었다고 혹평받기도 했다.

그러나 완당은 세계를 통찰하는 창조적 정신을 적극 지지했다. 예컨대 그가 시를 논할 때(論詩) "어찌 지난 시대의 격조를 억지로 본받아 남의 정신으로 뜻없이 자기의 목소리를 울리랴(格調苟沿襲 言用雷同詞)"고 답습의 풍조를 질타한 것, "원 나라와 명 나라 시인들은 옛 테두리에 얽매여 자기 시대의 격조를 만들지 못했으니 그들의 기량은 몹시 뒤떨어졌도다(元明不能變 非僅氣力衰)"며 창의성의 결여를 한탄하는 것, 계속해서 남의 흉내를 내는 것은 죽은 시정신이라며 창조적 정신을 강조하는 것('阮堂集' 卷三) 등은 그 구체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지적은 지금에도 유효하다.

첨부파일
비밀번호 수정 및 삭제하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관리자게시 게시안함 스팸신고 스팸해제 목록 삭제 수정 답변
댓글 수정

비밀번호 :

수정 취소

/ byte

비밀번호 : 확인 취소